
로마제국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처음부터 위대한 통치자로 태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였으며, 군사적 명성이나 화려한 정치 경력을 갖춘 지도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극심한 혼란에 빠진 로마를 통합하고 약 200년간 이어지는 ‘팍스 로마나’의 토대를 마련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암살되자 로마는 다시 권력투쟁에 빠졌다. 당시 18세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을 통해 양자이자 후계자로 지명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경험이 부족했지만 카이사르의 이름과 유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군인과 시민의 지지를 얻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구성하고 카이사르 암살 세력을 제거했다. 그러나 공동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권력을 나눈 지도자들은 곧 경쟁자가 됐으며 로마 세계는 옥타비아누스가 지배하는 서방과 안토니우스가 장악한 동방으로 갈라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그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전통을 버리고 이집트의 지배자가 되려 한다고 선전했다. 로마 내부의 권력투쟁을 외부 세력으로부터 로마를 지키는 전쟁으로 바꾼 것이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의 함대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듬해 두 사람이 사망하면서 오랜 내전은 사실상 끝났다. 로마 세계를 위협하던 경쟁자들이 사라졌고 옥타비아누스는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됐다.
그러나 그는 카이사르의 실패를 기억했다.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에 오르며 권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왕이 되려 한다는 의심을 받아 암살됐다. 옥타비아누스는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왕이나 독재자라는 명칭 대신 자신을 공화국의 ‘제1시민’을 뜻하는 프린켑스라고 불렀다.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국가의 권한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돌려주는 형식을 취했다. 원로원은 그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겉으로는 공화정이 회복됐지만 실질적인 군사권과 속주 통치권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집중됐다. 공화정의 제도를 없애지 않으면서도 그 위에 황제권을 세운 ‘원수정’이 시작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혼란을 끝낼 수 있었던 첫 번째 비결은 정치적 절제였다. 그는 모든 권력을 한꺼번에 차지했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원로원과 집정관, 민회 등 기존 제도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필요한 권한을 조금씩 확보했다. 귀족들에게 명예와 지위를 남겨주되 최종 결정권은 자신이 갖는 방식이었다.
두 번째는 군대 개혁이었다. 공화정 말기의 군대는 국가보다 장군 개인에게 충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력 장군들이 병사들에게 토지와 보상을 약속하고 군대를 사병처럼 이용하면서 내전이 반복됐다.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으로 늘어난 군대를 감축하고 상비군 체제를 정비했다. 복무기간과 급료, 제대 후 보상 기준을 마련해 군인의 생활을 국가가 책임지도록 했다.
군대를 안정적으로 관리한 것은 단순한 국방정책이 아니었다. 제때 보상받지 못한 병사들이 새로운 반란 세력에 가담하는 것을 막고, 장군 개인이 군대를 앞세워 권력을 빼앗는 위험을 줄이는 정치개혁이었다.
세 번째는 속주와 조세제도의 정비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영토를 원로원이 관리하는 지역과 황제가 직접 관리하는 지역으로 나눴다. 군단이 배치된 주요 국경지역은 자신의 통제 아래 뒀다. 인구와 재산을 조사하고 세금 징수체계를 정비해 지방 관리와 민간 징세업자의 자의적인 수탈을 줄이려 했다.
도로와 항만 등 기반시설도 확충됐다. 안전한 육상·해상 교통망은 군대의 신속한 이동뿐 아니라 상품과 사람, 정보의 교류를 촉진했다. 치안과 행정이 안정되자 지중해 무역이 활성화됐고, 오랜 내전으로 지친 시민들은 평화가 가져온 경제적 효과를 체감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건축과 문화도 정치에 활용했다. 신전과 광장, 극장, 수도시설을 정비해 수도 로마의 모습을 바꿨으며, 예술과 문학을 후원해 새로운 시대의 이상을 널리 알렸다. 젊고 이상적인 모습으로 표현된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상’은 군사적 승리와 신성한 권위를 동시에 보여주는 대표적인 정치 이미지다.
그가 만든 평화에는 분명한 한계도 있었다. 표현과 정치적 경쟁의 자유는 공화정 시대보다 줄었고, 원로원은 실질적인 주도권을 잃었다. 평화는 시민의 자유로운 합의뿐 아니라 군사적 승리와 권력 집중을 통해 만들어졌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을 부활시켰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황제 중심의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
아우구스투스의 성공은 혼란을 끝내기 위해 강한 지도자 한 사람만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가 오래 통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승리 이후 경쟁자를 제거하는 데 머물지 않고 군대와 행정, 조세와 교통을 안정된 제도로 바꿨기 때문이다.
역사는 권력을 잡는 것보다 질서를 제도로 만드는 일이 더 어렵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자였지만, 그의 진정한 정치적 능력은 승리한 다음에 드러났다. 혼란을 끝내는 힘은 상대를 이기는 데서 시작될 수 있지만, 평화를 지속하는 힘은 예측 가능한 제도와 시민의 신뢰에서 완성된다.

